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은 다름 아닌 '정보의 혼란'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정보에 목말라 있지만 무작위적인 정보의 양이 너무도 거대해서 진짜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지 못한다.
인간의 일생은 정보의 지배를 받는다. DNA에서 도시계획, 영적탐험에 이르기까지 '정보'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일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정보를 접하는 방식 다시 말해 누구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언제, 어떤 환경에서 정보를 습득하느냐는 가히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을 때 고도의 분별력이 필요하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도 소용없다. 분별력이 없으면 없는 만큼 주어진 정보에 맹목적이 되고, 종속적인 존재가 된다. 일말의 분별력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찰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온갖 공포스러운 소식, 아주 기쁜 소식,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아주 혼란스러운 소식들이 가득하니까.
진실 그 자체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고도로 복잡해지고, 파편화된 사회에서는 결국 진실의 부재로 인한 고통이 존재한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차단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는지 그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진정성이 해답이 되겠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 경우는 조해리의 창Joharry's window이 제시한 상호무지(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의 영역이 존재한다. 무엇을 알아야 할지 모른다면, 그것을 알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폐쇄된 문화를 사는 사람들의 고통이 가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폐쇄된 사회에서는 정보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정보의 독점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기득권을 획득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고통은 급격히 커진다.
사회는 행복을 강제하지만 행복은 결단코 답이 아니다. 행복은 조작된 개념이며 불행의 또 다른 이름일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종교 지도자들까지 이런 무지에 한 몫 하고 있으므로, 고통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진정성'과 '분별력' 모두를 갖추는 일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와 같이 모두가 바쁜 구조 속에서는 시간과 인내를 요하는 이같은 노력을 좀처럼 하려 들지 않는다. 그 결과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영향을 받는 수 많은 사람들의 무지는 상호무지가 되고, 해당 공동체의 일원들은 주어진 정보의 틀 안에 다같이 갇히게 된다. 무언가를 알고 있을 때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이라는 말을 쓸 수 있지만, 무엇을 모르는지 아무도 모를 때는 고통과 무지가 당연시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친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피학성 변태 성욕자들조차 태생적으로는 그런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연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현실직시, 즉 '직면'하는 것보다 강한 변화의 원동력은 없다. 현실 그 자체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열쇠가 주어진다. 삶의 희망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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